가마터
양구백자가마터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즐겁고 유익한 시간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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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룡리 9호 요지
1. 성격 : 17~18세기2. 위치 : 38˚11.39N, 127˚55.20E방산면에서 오미령을 넘으면서 오미령 정상부에서 500m 지점에 오른쪽으로 첫 골짜기가 나오는데 도로에서 골짜기로 800여m되는 지점에 가마터가 있다. 지번상으로는 양구읍 상무룡리 산165-1번지에 해당한다.3. 현상 : 현재는 숲과 잡목이 우거졌으나 20여년 전만해도 火田으로 경작되었던 곳이다. 계곡을 끼고 있어 도편이 계곡리 따라 흘러내렸으며 가마터 부근은 하절기 수해로 곳곳이 패여있고 그 사이로 도편들이 흩어져 있다.4. 유물 : 주로 오목굽에 모래받침 백자류이나,죽절굽에 짙은 녹색의 유약이 입혀진 대형기 편도 수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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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룡리 8호 요지
1. 성격 : 17~18세기 백자2. 위치 : 38˚12.16N, 127˚56.88E방산에서 상무룡리 선착장으로 가는 도로 초입의 상무룡리7호 못미쳐 오른편 계곡. 계곡으로 약5~10분 걸어서 현재 황기밭으로 경작되고 있는곳. 지번상으로 상무룡리19전,20전 일대이다.3. 현상 : 계곡의 방향이 동남쪽으로 트여 있고 경사가 완만하여 매우 아늑한 지역이다. 현재는 일대가 모두 황기으로 경작되고 있는 곳으로 아랫부분에서 도편이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경작지 이에도 군데군데 주택의 초석으로 사용된 듯한 돌무더기들이 있어서 주거지로 인해 가마퇴적의 일부는 이미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 유물 : 주로 오목굽에 모래받침 백자류가 철화백자와 함께 동반되며,시기가 늦은 것으로 보이는 청화백자,도기류도 주변에서 함께 수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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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룡리 7호 요지
1. 성격 : 19~20세기 백자2. 위치 : 38˚09.79N,127˚55.64E방산방면 상무룡리 입구쪽에서 도로를 따라 들어가다가 왼편으로 버섯모양의 지붕을 한새로 지은 주택이 나오는데 그 집의 왼편과 집 앞 도로 맞은편 사면 일대. 상무룡1리27번지에 해당한다.3. 현상 : 도로를 개설하면서 자연구릉은 이미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도로 우측의 구릉 단면과 맞은편 주택 주변에 많은 양의 파편이 노풀되어 있다. 그러나 주택 주변에서 바견되는 파편은 주택 축조시 맞은편 언덕의 흙을 일부 파내어 축대를 축조하는 과정에서 흘러든 것으로 보인다.4. 유물 : 무문의 백자 발,완,잔,접시류가 주종을 이룬다. 특히 굽을 각지게 깍은 제기류가 다량으로 수집된다. 한편 도석을 분쇄하는데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갈돌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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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룡리 6호 요지
1. 성격 : 19~20세기 백자2. 위치 : 38˚10.13N, 127˚56.11E상무룡리 5호에서 방산방면 입구쪽으로 나오다가 비포장도로가 나오는데 그 도로 아래 뒷편에서 모두 가마폐기물과 백자편이 수습된다. 주변에 표적이나 기준이 될만한 것이없다. 지번상으로 상무룡리26에 해당한다.3. 현상 : 상무룡리5호와 마찬가지로 현재 난 도로로 인해 구릉의 중간이 잘려나갔으며 훼손이 심하다.도로 중간에 소토와 도편들이 소량 있다. 도로 아래로는 경작지가 있고 경작지 아래로는 계곡이 흐르고 있는 지형이다.4. 유물 : 모래받침에 굽 안쪽을 깊게 깎아낸 백자가 주류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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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룡리 5호 요지
1. 성격 : 19~20세기 백자2. 위치 : 38˚09.04N, 127˚55.22E방산 방면 상무룡리 입구에서 상무룡1리 방면으로 가다가 도로 오른편에 컨테이너 주택이 나오고 그 주택을 기준으로 도로 아래쪽,지번상으로는 278-1유이다.3. 현상 : 도로가 개설되면서 능선 위쪽의 흙과 축대를 만들기 위한 석재가 10m아래까지 쌓여 있고 그 맨 아래쪽에서 도편과 가마벽편 등이 수거되었다. 또 경사면 아라쪽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어서 유적이 훼손되었거나 흙에 매몰괴었을 것으로 본다.4. 유물 : 유 ● 태가 정선된 무문의 경질 백자 발,접시류가 주류를 이룸. 모래받침으로 번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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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룡리 4호 요지
1. 성격 : 조선후기 옹기가마2. 위치 : 38˚08.69N, 127˚54.99E상무룡1리 방산골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들어간곳.3. 현상 : 현재는 가마 퇴적은 거의 훼손되었으며 가마벽편과 옹기편들이 발견수습된다.4. 유물 : 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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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룡리 3호 요지
1. 성격 : 13,19세기 백자2. 위치 : 38˚09.00N, 127˚54.99E상무룡리 1,2호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이승만 전 대통령 별장의 능선 안쪽구릉. 지번상으로 상무룡리 1286유에 해당한다.3. 현상 : 갈수기에만 드러나는 곳으로 호수외의 접수면 능선에서 도침과 가마벽편등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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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룡리 2호 요지
1. 성격 : 조선중기 백자2. 위치 : 38˚09.37, 127˚09.32E파로호로 인해 수몰된 지역. 구 이승만 대통령 별장터. 옛 지명은 허수리. 지번상으로 상무룡리 1274유에 해당된다. 현재는 친구되었으며 상무룡리 1호와 인접해 있다.3. 현상 : 현재 침수지역으로 선편으로 주변에 접근했으나 유물을 수거하지는 못했다. 이 가마에 대해서는 강원도· 강원대학교박물관 『上舞龍里』198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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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룡리 1호 요지
1. 성격 : 조선중기 백자2. 위치 : 38˚09.59N, 127˚54.29E파로호로 인해 수몰된 지역. 구 이승만 대통령 별장터. 옛지명은 허수리로 현재 비번상으로는 상무룡리 1274유에 해당된다.3. 현상 : 현재는 침수됨. 현장에 접근했으나 유물은 수거하지 못했다. 이 가마에 대해서는 강원도 · 강원대학교박물관,『上舞龍里』198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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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 4호 요지
1. 성격 : 19~20세기 옹기, 백자2. 위치 : 오미리 마을회관에서 갈골천을 따라 600m 오르면 갈골천 오른쪽에 흑연광산 골짜기가 있고 100여m 더 올라가면 옹기가마터가 있다. 위치의 지번은 오미리 497번지에 해당한다.3. 현상 : 지금은 경작지로 가마터 자리만 30여m 흔적이 남아있고 도편은 옹기도편과 자기파편이 섞여 산재해 있다. 주변 토지는 진흙땅으로 이루어졌으며 가마자리는 시커멓게 주변땅과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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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 3호 요지
1. 성격 : 19~20세기 백자2. 위치 : 38˚10.77N, 127˚53.72E오미리 피모개천을 따라 올라가다가 오른편 경작지 뒷편 구릉으로 하천 맞은편이 도중골입구이다. 지번상으로는 오미리 661-답에 해당한다.3. 현상 : 논 밭으로 경작하고 있어서 자연구릉은 파괴되었으며 남아있는 구릉의 단애에서 유물이 수습된다.4. 유물 : 백자, 청화백자 및 근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백자류가 주종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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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 2호 요지
1. 성격 : 17~18세기 백자2. 위치 : 38˚10.89N, 127˚58.83E오미리 종점에서 군도 6호선을 따라 1.5km를 가면 안터교가 나오고 다리건너 300m쯤 가면 오른쪽 골이 안터 마을이다. 도로에서 안터전을 따라가다가 손운봉씨 집을 지나 오른쪽이 능골이다. 이곳에서 하천을 따라 약 10분가량 들어가면 오른편으로 있는 경작하지 않는 밭이 있는데 이 곳이 가마터이다. 지번상으로는 오미리 927전, 928전에 해당한다. 3. 현상 : 경작지로 활용되고 있는 곳으로 경사도는 14˚인데 비교적 자연 경사면은 남아 있다. 그러나 오래전 민가가 있었던 흔적이 있고 현재도 지표에서는 농작이 이루어 지고 있어 부분적인 훼손이 있다. 폭우로 군데군데 진입로와 경사면이 패여 있는데 그 경사면을 따라 도편과 가마폐기물들이 수습된다.4. 유물 : 오목굽에 모래받침을 받친 백자 발, 완, 접시 등이 주류를 이루며 철화백자가 동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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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 1호 요지
1. 성격 : 정확지 않음2. 위치 : 38˚11.40N, 127˚55.26E3. 현상 : 도로 개설로 이미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데 길을 따라 가마유구의 단면 소토층이 드러나 있다. 주변에 도편은 없으나 가마벽편 등이 있다. 개천의 상류쪽에는 흑연광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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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악리 4호 요지
1. 성격 : 17~20세기 백자2. 위치 : 38˚12.96N, 127˚55.83E금악교를 건너기 전 수입천을 따라 오른편 마을로 들어가면 소위 '골말' 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작은 개천을 따라 올라가다가 양갈래 길에서 오른편의 한성만씨 집 옆과 뒷편의 밭일대. 지번상으로 금악리 408, 409전에 해당됨.3. 현상 : 현재 민가가 있고 민가 옆과 뒤쪽으로는 경작지가 있다. 지표상에 도편과 가마관련 폐기물들이 수습된다. 이미 경작지와 분묘 등으로 일대의 지형이 변경된 것으로 보아 유적은 많이 훼손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4. 유물 : 오목굽에 모래받침 백자류부터 굽 안쪽을 깊게 깎은 유형에 이르기까지 조선후기의 각 시기에 해당하는 백자가 수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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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악리 3호 요지
1. 성격 : 19~20세기 백자2. 위치 : 38˚10.97N, 127˚57.37E금악리 2호 지나 6번 군도를 따라 성곡령으로 올라가다가 거의 정상부 부근에서 왼편으로는 경작지가 있고 오른편으로는 경작지와 잣나무 단지가 나오는 지점으로 도로 바로 왼편 아래쪽사면 일대가 중심이다. 지번상으로는 금악리 85전, 86전, 145임이다.3. 현상 : 31번 군도가 관통하는 지역으로 도로의 아래쪽 사면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도편이 수거되고 있다. 그러나 경사면 바로 위쪽은 평평한 경작지가 있고 그 위가 도로인 점과 현재 도편이 발견되는 지점의 경사가 너무 심해서 도로와 경작지를 개설하면서 퇴적의 윗부분 일부가 깎여 사면으로 흘러내렸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3. 유물 : 작고 낮은 다리굽에 모래받침으로 거의 포개구운 흔적은 없으며 굽까지 전면 시유한 비교적 질 좋은 백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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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악리 2호 요지
1. 성격 : 14~18세기 백자2. 위치 : 38도 11.39N, 127도 56.45E금악리 1호를 지나 성곡령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왼편으로 '샘이깊은 계곡(옛 이름-금강가든)' 이라는 음식점이 나오는데 그 음식점쪽으로 들어서서 작은 개천을 건너 왼편에 보이는 구릉이다. 구릉에는 현재 민묘가 1기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양어장이 있다. 지번상으로는 금악리 116-1전,116임이다.3. 현상 : 구릉의 일부가 남아있고 민묘와 도로,음식점,양어장 등을 개설하면서 이미 훼손이 심한편이다. 다만 구릉의 정상부와 단애면 등 자연퇴적으로 보이는 곳에서 도편과 가마폐기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며,주변 일대에는 공사시에 밀려난 것으로 보이는 파편들이 넓게 분포한다. 1개의 구릉에 서로 시기적 차이를 보이는 도편들이 함께 발견되고 있어서 크게 2시기에 걸쳐요업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생각된다.4. 유물 : 태토비짐받침에 다리굽을 기본으로 하는 고려백자 유형(가)과 오목굽에 모래받침으로 포개구운 조선 후기 유형(나)이 함께 수습된다. 가유형은 녹색이 감도는 유색의 백자로 내저원각 있는 대접과 발,측선이 꺽인 접시,전접시 등이 주종을 이루며(나)유형은 발,완,접시등이 있다. 드물게 청자편이 함께 수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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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악리 1호 요지
1. 성격 : 14~15세기 백자2. 위치 : 38도 11.73N,127도 55.94E金岳橋를 지나 성곡령 방향으로 좌회전 하자마자 왼편에 보이는 구릉의 경작지. 안성암이라는 암자로 들어가는 진입로 왼편이다. 지역인들은 이 곳 일대를 '버덩말' 이라고 부른다. 지번상으로는 금악리465전,산60에 해당한다.3. 현상 : 구릉의 윗부분은 경작지와 민묘로 사용되었고 구릉을 중심으로 주변이 모두 도로가 나있어 이미 상당부분 훼손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작지 표도와주면의 농수로,구릉의남서쪽 아래로 펼쳐진 논과 밭일대 넓은 지역에서 이 가마의 제작품으로 보이는 같은 유형의도편과 가마 폐기물이 수습된다. 현재의 경사도는10도이다.4. 유물 : 유약에 푸른 기가 도는 백자 발, 접시가 대부분이고 제기로 생각되는 것도 있다. 태토비짐받침을 받쳐 구웠다. 대부분은 무문이지만 일부 제기로 보이는 것 가운데 음각,첩화장식을 사용한 것이 있다. 요도구는 원주형 도침,구멍뚫린 받침이 있고 내면에 백토를 바르지 않은 가마벽편이 수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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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리 7호 요지
1. 성격 : 14~15세기 백자2. 위치 : 38°12.62N, 127°58.49E 송현리와 장평리의 경계지역. 460번 지방도로를 따라 방산면으로 들어서서 왼편으로 수입천 너머 장평리와의 인접지에 위치한다. 송현리 5호에서 마을을 지나는 농로를 따라 도보로 15분 정도 가면 왼편에 작은 계곡이 있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박장군묘’ 라고 부르는 묘가 있는데 그 묘를 기준으로 오른편 아래쪽 경사 면 일대가 가마터이다. 지번 상으로는 산 8임에 해당한다.3. 현상 : 현재 잡목이 우거져 하절기에는 접근이 어렵다. 구릉의 위쪽인 무덤 부근에서도 도편이 수습되나 구릉의 하단 부에서 백자편과 가마벽편, 요도구등이 집중적으로 수습된다.4. 유물 : 백자류는 기벽과 釉가 얇고 빙렬 있으며 절요접시, 내저 원각 있 는 깊은 발, 내면이 낮고 낮은 대접, 안굽 등 일반적 고려 후기 의 특징을 보여준다. 가마벽편과 태토비짐 받침도 함께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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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리 6호 요지
1. 성격 : 19~20세기 옹기가마2. 위치 : 38°12.64N, 127°57.12E 460번 지방도로를 따라 방산면으로 들어서서 오른편으로 백석 산 아파트가 있는데 이 아파트를 가로질러 뒤편으로 개울을 건너 50여미터 올라가 오른편 구릉 사면에 위치한다.. 지번 상으로는 송현리 562-1전이다.3. 현상 : 현재는 밭고 논으로 개간되어 도편들이 넓게 흩어져 있다. 구릉과 밭의 경계 부근에서 옹기편과 소토들이 집중적으로 수거 된다.4. 유물 : 대개가 항아리 같은 대형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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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리 5호
1. 성격 : 14~15세기 백자2. 위치 : 38°12.64N, 127°57.12E 460번 지방도로를 따라 방산면으로 들어서서 왼편으로 수입천 너머 장평리와의 인접지에 위치한다. 군에서 관리하는 상수도 관련 시설물과 관리소가 있는데 그 곳으로 가는 진입도로 왼편 에 민가가, 그 뒤편으로 밭과 분묘가 있고, 작은 구릉이 남아 있 는데 그 구릉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가 가마터이다. 지번 상으로는 송현리 518전, 519전에 해당한다.3. 현상 : 현재 개간된 밭과 남아 있는 구릉을 중심으로 도편과 가마 벽편 등의 가마 폐기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주변을 경작지로 개간 하면서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마터 아래쪽의 민가와 그 둘레 경작지에서도 도편과 가마 벽편 등이 수집된다.4. 유물 : 태토는 불순물이 있으나 비교적 희고, 유약은 맑은 녹색이 감도 는 색조를 띤다. 대부분 태토 비짐 받침으로 번조되었으며 맨 아래 놓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은 모래를 받쳐 구웠다. 기형 은 내저 원각 있는 발, 접시, 측선이 꺾여 올라간 접시등이 대부 분이고 도침은 원주형이다. 태토와 유색을 제외하면 기형과 받 침, 요도구 등이 고려 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한편 이 곳에서는 접시의 굽 바로 위쪽에 印刻으로 ‘예빈시(賓寺)’라고 새겨진 도편이 발견되어 단순한 지방가마는 아니었을 것으로 판 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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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리 3호 요지
1. 성격 : 17-18세기 백자2. 위치 : 38°10.89N, 127°58.83E현리 선안 금잔디 부대 뒤편 골짜기.현재는 민간인 통제 구역으로 초소 입구에서 100여미터 올라가면 두 갈래의 갈림 길이 있는데 여기서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갈림길이 나온다. 왼편은 더덕 밭이고, 오른쪽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 논 바로 옆 골짜기 아래가 가마이다. 지번상으로는 현리 297전, 294전 경계부근이다. 3. 현상 : 작은 골짜기가 무너져 내려 흙이 많이 덮여 있으며 숲이 우거진 곳이다. 붉은색 소토편과 가마벽편, 회백색의 오목굽의 모래받침을 한 백자류가 흩어져 있다. 철화백자는 보이지 않으나 도편의 곳곳에 가마 천장에서 흘러 내린 것으로 보이는 철분 덩어리가 붙어 있다.4. 유물 : 모래 받침의 오목굽 백자류, 가마 벽편과 불 먹을 돌, 초벌편 있음.조선 전기로 올라갈 것으로 추정되는 기벽이 얇는 도편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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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리 2호 요지
1. 성격 : 17-18세기 백자2. 위치 : 38°12.48N, 127°56.02E 금잔디부대 뒤편 사격장 일대. 현리1호와 인접하여 있음. 지번 상으로 현리 226전이다.3. 현상 : 현재는 부대 사격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지역으로 경작지로 활용 되고 있어서 이미 대부분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소량의 파편과 가마 벽편만 남아 있다.4. 유물 : 오목굽에 모래 받침 회백자류가 대부분이며, 주로 접시가 발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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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리 1호 요지
1. 성격 : 19-20세기 백자2. 위치 : 38°13.00N, 127°55.69E현리 선안의 금잔디 부대 철조망 담 옆. 부대의 철조망과 인접한 논 둑 부근이다. 지번상으로 현리 227-2전이다.3. 현상 : 부대와 경계부분 둑 단면에서 살아있는 가마벽선의 일부가 가늘게 보임.현재 논으로 경작되고 있는 곳에서도 파편이 수습됨.대부분의 퇴적은 주변 경작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4. 유물 : 일상용기인 백자 발, 완 등이 주종을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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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전리 5호 요지
1. 성격 : 19-20세기 기와 가마2. 위치 : 38°11.83N, 127°55.68E칠전리 2호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왼편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들어서서 왼편에 위치한다. 칠전리 4호와 가깝다.지번상으로는 현리 111전에 해당한다.3. 현상 : 가마는 거의 파괴되어 흔적이 없으며 주변 곳곳에 가마벽편과 기와편이 흩어져 있다. 흙을 파내어 논으로 개간하면서 잘려 나간 듯 주변 단애면에 약간 남아 있다. 4. 유물 : 기와편으로 여러 모양의 선문이 도드라지게 가득 찍혀 있다. 모두 검은색 점토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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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전리 4호 요지
1. 성격 : 19-20세기 기와 가마2. 위치 : 38°11.83N, 127°55.68E 칠전리 2호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 왼편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들어서서 오른쪽에 위치한다. 지번상으로는 칠 전리 110전, 105-2전에 해당한다.3. 현상 : 가마는 거의 파괴되어 마지막 칸으로 보이는 부분의 천장과 벽 일부만이 남아 있으며 주변 곳곳에 가마벽편이 흩어져 있다. 외부 에서 보면 그 일대가 눈에 잘 띄지 않으나 가마가 위치하는 주변 은 토질이 좋아 흙을 파내어 사용하여 평지로 변했고 현재는 논 이다.4. 유물 : 암키와와 수키와 종류만 수습되었는데 암키와에서는 수파문과 집단선문이, 수키와에는 卍자문과 雷문의 변형으로 보이는 문양 이 시문되고 있다. 모두 경질로 조선 후기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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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전리 3호 요지
1. 성격 : 17-19세기 백자2. 위치 : 38°12.17N, 127°56.96E칠전리 2호에서 다시 계곡을 따라 더 들어가면 계곡 오른편으로 다리가 있고 양곡 건조장이 있는데 그 윗편 경사진 길을 따라 50여 미터 올라가면 오른편에 넓은 경작지가 있다. 지번상으로는 칠전리 16전이다.3. 현상 : 구릉의 경사면이 모두 경작지로 변하여 거의 퇴적은 남아 있지 않으나 곳곳에서 가마벽편과 백자편들이 수습된다.4.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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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전리 2호 요지
1. 성격 : 17-20세기 백자2. 위치 : 38°12.32N, 127°56.98E칠전리 1호에서 계곡을 따라 약 100여M 더 들어가면 왼편에 있는 밭이다.칠전리1호와 같은 선상에 위치한다. 지번으로는 칠전리 90대에 해당한다.3. 현상 : 현재 인가와 그에 달린 경작지가 있으며 그 위쪽으로는 산인데 본래 경사면이었던 일부가 깎여 밭이 된 것으로 보인다. 경작지 곳곳에 파편이 흩어져 있으나 주로 밭과 산의 경계지역에서 도편과 가마벽편 등이 발견된다.4. 유물 : 회백색의 오목굽 백자류를 비롯하여 조선 후기 청화백자까지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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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전리 1호 요지
1. 성격 : 19-20세기 백자2. 위치 : 38°12.32N, 127°56.98E현재 방산면사무소 건너편의 칠전교를 건너자 마자 왼편으로 집(김광문씨 집)이 한 채 있고 그 옆으로 손양수씨 집이 있는데 그 가옥들의 뒤편 구릉이다. 지번상으로는 칠전리90대,90-1대이다.3. 현상 : 구릉 전체는 옥수수와 고추등 작물을 심어 이미 경작지로 변해 있으며 그 밭이랑과 주변 일대에 도편과 가마 폐기물이 다량으로 산재해 있다. 유물의 범위나 퇴적의 양상으로 보아 적어도 2기 이상의 가마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언에 따르면 20세기 전반까지 이곳에서 가마가 운영되었는데 마지막 가마는 일본인 遠藤에 의해 운영되었다고 한다.4. 유물 : 19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백자, 청화백자가 주를 이룬다. 한편 현장 설명회 당시 이 지역은 칠전리 1,2호로 분리되었으나 유물 정리 과정에서 적지 않은 파편이 서로 붙는 것을 확인하게 됨에 따라 ‘칠전리1호’로 통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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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리 7호 요지
1. 성격 : 20세기 후반 백자가마2. 위치 : 38°12.63N, 127°57.14E방산 성결교회에서 선우골로 올라가는 길의 마을이 끝나는 지점 오른편.지번상으로는 장평리 270-5대이다.3. 현상 : 1975년도에 만든 등요로 계단식이며, 아궁이를 제외하고 총 9칸으로 된 벽돌가마이다. 당시 선우골 도석의 광권을 가지고 있던 손정빈(孫正彬)씨가 郡費를 지원받아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현지의 증언에 따르면 가마 축조후 2-3회 정도 밖에는 불을 때지 않았다고 하며 생산품도 거의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 가마가 있는 위치는 과거 손정빈의 부친인 손찬재(孫燦在) 翁이 가마을 운영했던 곳이므로 아마 廢窯 후 과거의 가마를 기초로 다시 복원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는 가마 1기와 가마 남쪽으로 작업장 시설이 있고 길 맞은편으로는 도석을 분쇄하던 기계설비와 수비장의 잔해가 남아있다.4. 구조 : 가마는 벽돌과 흙으로 쌓아 축조하였는데 가마길이는현존 19.2M이며 뒤편 굴뚝부분은 파손되었다. 가마 우측에 출입시설이 있고 가마 칸 내부는 앞부분에 턱이져 있으며 바닥은 내화벽돌로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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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리 6호 요지
1. 성격 : 14-15세기 백자2. 위치 : 38°12.62N, 127°58.49E소위 ‘큰자월’이라고 부르는 계곡 안쪽. 자월천 상류를 따라 큰 자월 입구에서 도보로 약 40분 가량 계곡 안쪽으로 올라가다가 정상부 가까운 곳 계곡 왼편 경사면에 1975년도에 조림사업을 실시한 잣나무 숲이 있고 글 숲 경사면이 가마터이다. 지번상으로는 장평리이다.3. 현상 : 현재는 인적이 드물며 숲이 비교적 울창한 곳으로 조림된 나무들을 제외하면 경사면이나 퇴적이 약간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임. 경사도 측정 12도이며 가마벼편, 태토비짐 받침백자 등이 넓게 분포하며 현 지표에서 10cm이내에서 퇴적물들이 나온다.4. 유물 : 백자가 주를 이루며 유가 얇고 빙렬이 있으며 절요접시, 내저원각 없는 넓은 대접 등 고려 기형이 주를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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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리 5호 요지
1. 성격 : 20세기 근대가마2. 위치 : 38°12.43N, 127°57.11E직연폭포 윗편, 현 방산자기박물관 남쪽 논두렁 일대. 지번상으로는 장평리 235-3답에 해당된다.3. 현상 : 현재는 논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일부가 잘려 직연폭포로 내려가는 진입로가 나 있다. 자기편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근대식 벽돌가마의 잔편으로 보이는 불 먹은 벽돌들이논두렁에 일부 남아 있다. 전언에 따르면 충청도 천안 태생인 공무원 출신(정부기관 도예관련부서 종사)의 김상빈씨가 1957녕부터 60년 사이에 운영했다고 한다. 4. 유물 : 특별한 유물은 출토된 것이 없으며 요도구와 가마시설물만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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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리 4호 요지
1. 성격 : 19-20세기 백자2. 위치 : 38°12.63N, 127°57.14E방산 성결교회 선우골로 올라가는 길에 있으며 마을이 끝나는 지점 오른편으로 1975년도에 새로 만든 등요가 있는 데 그 오른쪽 구릉이다. 지번상으로는 장평리 270-5대이다.3. 현상 : 도편과 가마벽편 등이 퇴적되어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1975년의 가마가 인접하여 그 가마의 부산물일 것으로도 생각했으나 그 가마에서는 몇 차례 불을 땐 이후 거의 폐요 되었고 가마벽편 등이 남아 있어 현재 있는 가마보다 앞서 존해했던 가마였을 것으로 추정한다.4. 유물 : 백자, 청화백자, 가마벽편 등이 수집되며 외면에 각을 지운 높은 다리굽의 굽안을 오목하게 깎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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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리 3호 요지
1. 성격 : 14-20세기 백자2. 위치 : 38°12.53N, 127°57.00E방산 성결교회 남서측 사면 일대. 교회로 올라가는 계단의 좌우편 사면으로 지번상으로는 장평리 270-12대와 270-10대에 해당한다.3. 현상 : 현재는 교회 건물이 신축된 상태이며 교회로 올라가는 계단의 오른편 사면은 경사가 급하고 그 아래쪽은 주택과 옛 보건지소 건물등이 있고 그 앞으로 소로가 있는데 바로 이 지역 주변과 길의 남쪽 밭에서는 고려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 백자류가 가마벽편등과 함께 소량 채집되지만 현재로서는 거의 파괴되어 중심 퇴적을 찾을 수 없다. 교회 계단 왼편, 즉 교회 서편 기단 아래 경사면으로는 19-20세기의 백자, 청화백자과 가마벽편등이 밀집되어 퇴적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퇴적의 한 쪽 단면은 이미 경작지로 변하였다.4. 유물 : 14-15세기에 해당하는 태토비짐 받침의 백자류부터 17-20세기 백자까지 출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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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리 2호 요지
1. 성격 : 19-20세기 백자2. 위치 : 38° 13.16, 127°56.73E장평리 1호 가마에서 계곡 쪽으로 바로 인접한 작은 능선에 위치한다. 2호 역시 앞쪽으로 개울이 있으며 옆쪽으로도 작은 개울이 있어 가마터 주위로 선우골 본 계곡과 지류가 교차되는 지점이다. 지번으로는 장평리 산39임과 전 290에 걸쳐 있다.3. 현상 : 가마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는 일부는 고추밭으로 경작되고 일부는 군유지로 잣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경작지는 평평하게 깎여져 있고 그 아래로는 다시 산의 사면이며 밑으로 논이 있다. 장평리 주민 정태섭씨의 증언에 따르면 6.25때까지도 가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4. 유물 : 굽 높은 백자류, 굽을 각지게 깎은 유형이 있다. 19세기의 것들로 특히 접시는 굽 외면에 각을 지운 청화백자로 굽 안을 오목하게 깎고 당시 관요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모래비짐 받침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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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리 1호 요지
1. 성격 : 17-20세기 백자2. 위치 : 38° 13.23N, 127°56.73E방산 성결교회 옆 길을 따라 선우골로 들어서 골짜기를 따라 계속 올라 가다가 개울 건너 좌측으로 산의 사면을 개간한 넓은 경작지가 펼쳐지는데 그 아래쪽 밭 일대이며 지변으로 는 장평리 291전에 행당한다. 3. 현상 : 아래쪽으로 계곡을 끼고 있는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하는데 일대가 모두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작을 위해 밭을 갈아 낸 상태여서 지표에 바로 파편과 가마벽편 등이 넓게 산포한다.4. 유물 : 17세기 경에 해당하는 오목굽의 회백자류와 19세기 경의 백자와 청화백자류가 함께 출퇴된다.
현리 3호 요지
작성자방산자기박물관
등록일2006-11-26 11: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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